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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공 이태형 선생의 여주이씨 퇴로문중 (도원공파)이 일제시대에 민족의 자강과 문화독립운동을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례가 여럿이 있지만, 이 중 대표적인 것 몇가지를 선정하자면 (1) 정진학교의 설립과 (2) 성호문집의 목판본 편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진학교 약사
퇴로마을 가운데에 자리잡은 정진학교는 여주이씨 퇴로문중이 일제강점기에 설립한 사립학교로 정진의숙이란 명칭으로 시작한 애민애족의 정신을 실천한 문화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조선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던 의병투쟁 등 무력에 의한 독립운동의 길이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선각자들은 민족광복의 유일한 희망을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문화창달 운동에 걸었다. 이에 호응하여 1921년 3월 여주이씨 퇴로 문중은 민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서 화산의숙(1907~1910)의 정신을 이어받는 뜻에서 정진의숙이라 명명한 사립교육기관을 퇴로마을에 설립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후 당시 법에 따라 사립정진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공문서에서 단기연호의 사용, 애국창가 제창, 한국사, 한국지리 교육 등이 문제가 되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으며 마침내 교장, 교감, 교원 전원이 일경에 구속되어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후 정우회(정진학교 동문회)가 추진한 근로야학 독서회를 통한 향토건설운동의 인쇄물 문제 등으로 끝내 일제에 의해서 1939년 4월 강제 폐교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1945년 조국 광복과 더불어 공립학교로 인가되어 화양국민학교로 개칭되어 다시 문을 열고 운영하다 1960년 4월 정진의숙의 창학정신을 되살리려는 이고장 유지들의 노력으로 정진국민학교로 교명이 부활되었다.
정진학교는 경남의 한 시골 마을에 위치한 작은 규모의 학교였으나, 제헌국회의원 시곡공 이주형,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 농수산부 장관 이계순씨 등의 명사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1975년에는 정진동문회 (회장 안호상 박사)가 학교의 연원과 오랜 역사를 알려주는 '정진의숙 창학기념비'를 설립하는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유서깊은 정진국민학교는 정진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1998년에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현재, 정진학교 건물은 임실 치즈스쿨로 리모델링되어 사용되고 운동장 터에는 인성교육관 건물이 들어서 퇴로마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정진학교 역대 교장
1대 : 이병원 (율봉공)
2대: 이병곤 (퇴수재공)
3대: 이태형 (소은공)
4대: 이주형 (시곡공)
정진학교(1921년~1939년)는 "명륜정덕"과 "이용후생"을 창학정신으로 표방하였기에 교육의 중점을 전통윤리와 애국정신,그리고 신지식의 흡수에 두었다. 이것은 구래의 윤리교육을 고수하면서도,신학문을 수용한다고 하는, "신구병진"의 강한 표명이었다.
이런 바탕에서 수신과로서 소학과 사자서를 가르치고,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한글,국사,한국지리를 가르치고 애국가를 부르도록 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며, 여기에 산수, 이과 등의 신지식을 더하도록 한 것이다. 정진학교에서 사용했던 교재 및 부교재들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래의 서책들을 보면 이러한 중점 교육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진학교 창학기념비
여기 유서 깊은 배움터에 우리들의 역사를 적는다. 항재 이익구 선생이「화산의숙」을 창설한 것이 1890년대였는데, 선생은 허성재 문하에서 물려받은 성호학파의 실학사상을 이 고장에 심는 한편,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젊은이들에게 새 지식과기술을 가르쳤다. 나라가 남에게 빼앗기자 외국인 교사를 내보내고 학당의 문을 닫았다가 삼일운동을 치르고 난 1920년에 이병희,이병규,이병곤 선생 등 여러 어른은 화산의숙을 복구하여 학도들을 모집하면서 명칭을「정진의숙(1민1혔원)」으로 고쳤다. 화산의숙 때에는 서고정사,용현정사 등의 집을 빌려 사용했으나 정진의숙은 지금 이 자리에 넓은 땅과 아담한 교사를 가졌다. 그리고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위양, 대항,월산 등 인근 6동 주민의 생활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법령에 따라 의숙을 학교로 개칭하고 국민학교 과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면서 기본정신은 오직 겨레의 새싹을 키우는 데에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교조치를 당했다가 8.15해방 후에 공립학교로 인가되었으며 한 때 화양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어졌으나 창학의 이념을 살리기 위해 '정진'의 두 글자를 다시 회복하였다. 옛 일을 일깨워 앞날의 창조에 밑거름이 되게 함이다. 이번에 경향 각지에서 활약하는 많은 동창들이 힘을 모아 창학기념비를 세우면서 특별히 정진의숙을 표방한 것은 위로 ‘화산의숙’을 잇고 아래로 정진 학교로 뻗어 나온 결절점이 되기 때문이다. 아아,그날의 높은 뜻,이 돌과 함께 영원무궁하리라.
단기 4308년(서기 1975년) 9월 3일
정진동문회 회장 철학박사 안호상 지음
연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이가원씀
성호선생은 우리나라 실학의 큰 인물이다. 이분의 저서들이 목판으로 만들어져 널리 보급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여주이씨 퇴로문중이 주도가 되어 성호선생 문집 목판 발행사업이 추진되었다.
여주이씨 퇴로문중은 전국의 유생들의 지지와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1917년 퇴로마을에서 성호선생 문집을 목판으로 만들수 있게 되었다.
이 목판들은 현재 경상남도 지방문화재로 등재되어 여주이씨 문중의 장판각인 주장옥부(퇴로마을 내의 보본당 내 위치)에서 보관되다 안전과 보존을 위해 밀양 박물관에 옮겨져 보존 중이다.
<퇴로 여주이씨 문중 이야기 (이희련 저) 47~56쪽 발췌>
"... 성호 선생 몰후 160여 년이 지나도록 그의 유문이 상자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향내의 소눌 노상직, 금주 허채 등이 등 제공과 상의한 끝에, 결국 퇴로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결단했던 것이다.
우선, 기호(서울.인천을 포함하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유고의 소재를 탐문한 끝에, 1916년 12월에 선생의 방손인 진암 이덕구 씨와 유생 이장직씨가 원고를 퇴로로 가져오게 되어, 그 사본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심재 조긍섭, 물와 김상욱 등 당대의 학자들이 초고의 교정을 보았고,서수 7명,각수 30여명을 동원하여 1917년 정월 11일에 개판하였는데, 공역을 촉진한 결과 그 해 4월 8일에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